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매싱 펌킨스 (문단 편집) ==== 1988년 ~ 2000년 ==== 1988년, 시카고의 한 레코드 가게에서 일하던 [[빌리 코건]]은 [[제임스 이하]]를 만난다. 둘 모두 기타리스트라는 것과 동생이 장애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서로 친해지게 되었고 이후 함께 데모 테이프를 만든다. 이 데모에서 코건이 2곡, 이하가 1곡을 썼는데, 코건이 이하가 쓴 곡을 크게 비판해서 기분이 상한 이하는 한동안 빌리 코건과 말도 하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빌리와 제임스는 함께 락밴드의 공연을 보러 갔고, 평소처럼 공연을 마친 밴드를 신나게 까고(…) 있던 차, 옆에서 그 말을 듣고 화난 여자와 말다툼을 하게 되는데, 그 여자가 바로 다아시 레츠키였다. 말다툼 당시 다아시는 자신이 베이스 기타를 연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어필하였고 두 사람은 이렇게 우연히 인연이 닿은 다아시를 베이스로 영입, 락밴드 스매싱 펌킨스를 결성하였다. 참고로 스매싱 펌킨스라는 밴드 이름은 빌리 코건이 제안한 이름이었는데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는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빌리 코건의 주장을 반대했지만 빌리가 "밴드의 메인 송라이터는 나니까 내 의견에 따라라" 하고 밀어붙여서 밴드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스매싱 펌킨스는 시카고의 나이트 클럽 ‘아발론’에서 성공적으로 데뷔 라이브를 마쳤고 데뷔 공연 직후, 시카고에 위치한 클럽 메트로 사장이 드러머를 고용하면 밴드가 클럽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허락하겠다는 말에 이들은 재즈 드러머 출신의 지미 체임벌린을 맞아들여 밴드의 라인업을 완성했다. 완전체 멤버들의 첫 공연은 [[1988년]] [[10월 5일]], 클럽 메트로에서의 공연이었다. 1990년, [[너바나(밴드)|너바나]], [[소닉 유스]] 등이 소속되었던 레이블 서브 팝을 통해 발표한 그들의 데뷔 싱글인 ‘I Am One’과 후속 싱글 ‘Tristessa’가 순식간에 품절되자 이에 자신감을 얻은 스매싱 펌킨스는 메이저 진출을 시도했고, 이후 메이저 레이블 버진 레코드와 계약에 성공, [[1991년]] [[5월 28일]] Caroline 레이블에서 대망의 1집 [[Gish]]를 발매하게 된다. 프로듀서 부치 빅의 Smart Studios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몽롱한 디스토션이 걸린, 단순하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타 리프가 돋보이는 밴드 극초기의 곡들인 'Siva'와 'Bury Me', 프로그레시브 록을 연상시키는 역동적인 구조와 시적인 가사가 돋보이는 'Rhinoceros', 'Snail' 등 몽환적인 얼터너티브 사운드, 하드 록과 어쿠스틱 사운드를 적절히 배합시킨 곡들을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앨범 녹음 기간 동안 빌리 코건은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지향점에 완벽하게 도달하기 위해 밴드 멤버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종종 자신이 직접 기타 및 베이스 트랙을 녹음하였고 이는 빌리 코건과 기타리스트 제임스 이하, 베이시스트 다아시 레츠키 사이에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1집 Gish가 발매된 직후 이들은 [[1991년]] [[6월 15일]]부터 15개월 간 Gish 월드 투어에 나섰고 9월에는 영국 Camden Underworld를 통해 유럽에 데뷔했다. 밴드는 수준급의 라이브를 통하여 나름의 명성을 얻었지만, 비슷한 시기 록씬을 평정했던 [[너바나]]의 [[Nevermind]], [[펄 잼]]의 [[Ten]] 등 그런지 및 얼터너티브에 밀리며 Gish는 호평에도 불구하고 기대했던 것보다 미진한 판매를 보인다. 게다가 빌리 코건은 투어 도중이었던 [[1992년]] [[2월 24일]]에 약혼녀인 [[코트니 러브]]가 [[커트 코베인]]과 [[혼전임신]]으로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우울증에 걸렸고[* 1집 녹음 직전, 빌리 코건은 코트니 러브를 만나 연애하게 되고 둘은 스매싱 펌킨스의 월드 투어와 홀의 전미 투어가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하지만 빌리 코건이 Gish 투어를 돌며 외국으로 떠나있는 사이에 코트니 러브는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과 양다리를 걸치기 시작했고 곧, 자신이 커트의 아이를 가진 것을 알게 되자 빌리 코건과의 결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직후 1992년 2월 24일 커트 코베인과 결혼해버렸다. 그래도 코트니의 밴드였던 [[홀(밴드)|홀]]에서 베이스 멤버를 이적시키는 일종의 딜링으로 인연을 이어갔던데다 2010년 홀의 컴백앨범 제작에 참여 하는 등 웬수사이는 청산하고 어느 시점에선 화해한듯 싶다.]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을 하기 시작했으며, 연인 사이였던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는 파경을 맞이하였다. [[1992년]] [[9월 12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Gish 월드 투어가 끝난 후 빌리 코건은 우울증에 시달린 채로 시카고의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날 빌리 코건은 극심한 우울증 때문에 자살 시도까지 하게 되고 빌리 코건의 전 여자친구이자 소꿉친구인 크리스 파비언은 빌리 코건이 자살 시도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빌리에게 찾아가서 그의 우울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이러한 크리스 퍼비언의 따뜻한 마음씨에 감동한 빌리 코건은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두 사람은 다시 연인이 되었다. 이후 빌리 코건은 '사람들이 자신과 밴드를 기억해줄만한 명반 하나는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기타를 잡고 작곡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레코드 임원들은 스매싱 펌킨스 1집의 저조한 판매량을 이유로 계약을 파기하려고 했고 결국 빌리 코건은 임원들 앞에서 혼자 어쿠스틱 기타를 들고 자신이 작곡한 곡을 연주해 평가를 받는 상황까지 오게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굴욕적인 행동까지 해야 한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져보자고 생각한 빌리 코건은 일부러 연주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임원들은 그것을 듣고 그런지의 과격함이 묻어나오는 것 같다며 앨범 제작을 허락했다는 것이다. 2집의 제작이 성사되자 빌리 코건은 멤버들에게 연락을 했고 밴드는 [[1992년]] [[11월]] 부터 본격적으로 리허설을 시작했으나 드러머인 지미 체임벌린은 [[헤로인]]에 중독되어 헤롱거리고 있었고 연인 사이였다가 Gish 투어 막바지에 헤어졌던 제임스와 다아시는 같이 한 장소에 있는 것도 거부할 정도로 사이가 악화된 상태였다.[* 2집의 프로듀서 부치 빅은 당시 밴드의 상황을 "리허설 때 멤버들은 메일 서로 싸웠고 회의할때에는 멤버들 사이에 고성이 수시로 오갔다. 그래서 나는 '이 밴드는 이제 끝났다'라고 생각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자 빌리 코건은 애틀란타에 있는 Triclops Sound Studios에서 프로듀서 부치 빅의 도움을 받으며 지미 체임벌린이 미리 녹음한 드럼 파트를 제외하고 모든 악기를 혼자서 다 연주하며 앨범을 완성시킨다. 부치 빅은 2집 앨범을 녹음했을 당시 빌리 코건과의 작업을 "우리들은 앨범 완성도의 기준을 정말 높게 잡았다. 모든 작업이 아날로그 테이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렸고 우리들은 4달 내내 일주일에 6일을 12시간 동안 녹음실에서 씨름하면서 엘범 작업에 열중했다. 마지막 두 달 동안은 일정이 밀려서 일주일에 7일, 하루에 14~15시간씩 녹음을 진행했다."라고 회고했다. [[1993년]] [[3월]], 앨범 녹음이 완료되자 빌리 코건은 이번 앨범은 분명히 성공할 것이라며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에게 밴드에 재가입하라고 설득하였고 빌리 코건의 설득에 넘어간 두 사람은 다시 밴드에 가입했다. 이후 밴드는 본격적으로 투어 리허설을 하게 된다. 한편, [[1993년]] [[6월]]. 빌리 코건은 마침내 연인이던 크리스 퍼비언과 자신의 집에서 약소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1993년]] [[7월 27일]], 마침내 2집 [[Siamese Dream]]이 발매되었다. 앨범은 첫 싱글 [[Today(스매싱 펌킨스)|Today]]가 전미에 유명세를 타며 4백만장이 판매되었고 1993년 빌보드 차트에서도 4위까지 올랐다. 앨범 전반에서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을 연상시키는[* 실제로 빌리 코건은 2집 인터뷰 당시 My Bloody Valentine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밝힌 바 있다.] 매우 진한 퍼즈 톤이 사용되었으며, 지저분한 기타 리프가 인상적인 오프닝 트랙 'Cherub Rock', 첫번째 싱글로 발매되었고 지금도 밴드의 대표곡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Today', 자신의 불행한 유년 시절을 담은 'Disarm', 병으로 고생하는 동생 Jesse를 위해 만든 'Spaceboy' 등 해당 앨범 수록곡들 대다수가 명곡으로 꼽힌다. [[1994년]] [[9월 8일]] 공연을 마지막으로 13개월에 걸친 2집 투어가 마무리 된 후 빌리 코건은 '다음 앨범을 마지막으로 밴드가 해체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완벽한 앨범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서 일생일대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게 되는데, 바로 1995년 발매한 2CD 앨범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였다. 빌리 코건은 사실상 자신의 솔로 앨범이었던 전작과 달리, 밴드 구성원들이 다함께 협력하는 온전한 밴드 앨범을 만들고 싶어했고 전작에서 담지 못했던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앨범에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빌리는 그전까지 스매싱 펌킨스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부치 빅 대신에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플러드[* 프로듀서로서 실력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사례가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작업이고, 이외에도 [[U2]], [[디페시 모드]], [[이레이저]], [[PJ 하비]] 등과 작업한 바 있는 최고의 프로듀서 중 하나이다.]와 [[마이 블러디 밸런타인]]의 명반 [[Loveless]] 앨범의 앤지니어를 맡은 알란 모울더(Alan Moulder) 라는 2명의 프로듀서를 고용하였다. 플러드는 빌리 코건의 의견을 듣고 앨범 제작을 시작하면서 밴드가 리허설 룸 Pumpkinland에서 리허설을 마친뒤 곧바로 레코딩 스튜디오에 와서 녹음을 하는 방침을 내세웠고 앨범 녹음시에도 밴드 멤버들의 합주를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전작들은 악기를 각각 따로 녹음했다고 한다.] 플러드는 음악적인 요소 뿐만 아니라 밴드의 작업 환경에도 개입했다. 플러드가 비효율적인 스튜디오 환경을 바꾼 덕분에 멤버들은 의미 없는 대기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고 멤버들이 시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게 되어 빌리 코건의 솔로 앨범이나 다름 없던 전작과 달리 제임스 이하와 다아시 레츠키도 레코딩에 전적으로 참여하였다. 3집 앨범 제작 당시 빌리 코건은 전작의 성공 요소 중 하나였던 두꺼운 기타 사운드를 한층 발전시키면서도 이에 종속되지 않는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고자 했으며 이러한 기타 트랙의 연주는 1집 때처럼 빌리와 제임스가 반반 나누어서 담당했다. 또한, 각 CD의 마지막 두 곡은 제임스 이하가 작곡했고 두 곡 중 Farewell and Goodnight은 밴드 멤버 전체가 파트를 나눠 불렀다. 믹싱 과정에서는 처음으로 [[ProTools]]를 사용하여 디지털 레코딩을 시험하였다. 하지만 앨범 작업 중 빌리 코건의 워커홀릭 기질로 인해 밴드 멤버들은 하루에 15시간 레코딩이라는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야 했고 결국 멤버들간의 불화가 다시 심화되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_U7QGPz4xmA&t=963s|앨범 제작 과정이 담겨있는 666 테이프 영상]] 이러한 힘겨운 여정을 끝내고 [[1995년]] [[10월 24일]],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가 더블 앨범의 구성으로 발매되었다. 3집 발매 당시 음반사 관계자들은 더블 앨범으로 앨범을 발매하는 것은 앨범이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극구 말렸지만 빌리는 고집을 피우며 그 많고 심오한 음악들을 한 앨범에 때려 넣었고 그 결과 이 앨범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3집은 더블 앨범이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에서 900만장을 팔아치우며[* 이건 더블 앨범이라 앨범 판매량을 두배로 계산해서 집계된 결과이기도. 그러니까 앨범 450만개*2=900만장인 셈.]''' 빌보드에서 그해의 얼터너티브 락 부문을 수상하였다. 해당 앨범은 아름다운 멜로디를 기반으로 관현악 선율이 첨가된 ‘Tonight Tonight’에서부터 미니멀한 사운드의 [[1979(노래)|1979]], 강렬한 하드록인 ‘Bullet with Butterfly Wings’까지 다채로운 음악 스타일과 사춘기적 지성미라 말할 수 있을 잔혹하고도 서정적인 가사 등으로 2집 [[Siamese Dream]]과 더불어 스매싱 펌킨스가 발표한 앨범들 중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손꼽힌다. 다만 혹자는 지나치게 장황하다며 혹평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때문인지 거의 만장일치로 호평을 내리는 [[Siamese Dream]]에 비해 평균적인 평단의 평가는 다소 낮은 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Siamese Dream]]에 비해서지, 명반 대우를 받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youtube(4aeETEoNfOg)] 스매싱 펌킨스의 가장 성공한 싱글 [[1979(노래)|1979]].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두번째 싱글로 나왔다. [youtube(4KfBFdqdoZg)]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숨겨진 명곡 'Jellybelly.’ 이렇게 스매싱 펌킨스는 [[너바나(밴드)|너바나]]가 해체한 당시의 락 씬에서 본좌로 오르는 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시기 밴드의 상황은 최악이었다. 우선, 3집 투어 도중 [[헤로인]] 중독으로 키보디스트 멜보인이 세상을 떠났고, 드러머 지미 체임벌린이 마약소지혐의로 체포되면서 투어가 도중에 중단되었다. 그렇게 투어가 1달간 중단되는 동안 밴드 멤버들은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따로 놀기 시작했다. [[제임스 이하]]는 3집 앨범에서 자신의 곡이 대거 빠진 것에 대한 서운함을 갖고 있었기에 투어가 잠시 종료되자 자신의 솔로 1집 앨범을 준비하기 시작했으며 다아시 레츠키는 3집의 지나친 투어일정 때문에 임신 중임에도 몸을 돌보지 못하여 자신의 아이가 유산되자 우울증에 걸려 잠적했다. 빌리 코건도 친어머니 마사의 죽음으로 우울증이 재발한 상태였다. 중지되었던 투어는 드러머 맷 워커(ex-Filter), 키보디스트 데니스 플레밍(the Frogs)을 보강하여 [[1996년]] [[8월 27일]] 라스베가스에서 다시 시작되었고 투어가 종료된 후에도 스매싱 펌킨스는 활동을 이어갔다. 한편, 지미 체임벌린이 재활치료를 받고 밴드에 복귀할 때 까지 드러머를 공석으로 남겨놓고 싶다는 빌리 코건의 주장에 의해 스매싱 펌킨스는 투어가 종료된지 18개월 후인 [[1998년]] [[6월 2일]], 지미 체임벌린이 빠진 3인조의 라인업으로 새 앨범 를 발매했다. [* 4집 앨범 제작 당시 제임스 이하는 우울증이 심각한 상태였던 다아시 레츠키를 염려하여 빌리 코건에게 다아시가 정신건강을 회복할 때 까지 그녀에게 휴가를 주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앨범의 베이스는 빌리 코건과 제임스 이하가 반반 맡아서 연주하였다고 한다.] 는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앨범에는 디스토션으로 무장한 기타 리프는 온데간데없이 어쿠스틱한 피아노 반주에 시니컬하고 조용조용한 빌리의 목소리가 담겨있었고 전반적으로 [[일렉트로닉]]의 느낌이 강했다. 기존 사운드를 바란 팬들은 이에 실망했고 차트에서도 고전을 면치 못하며[* 약 20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더블 앨범이었던 전작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의 실질적인 판매량이 약 450만장인데, 이의 절반도 못 오는 수준.]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다만 시간이 흐른 현재는 [[범작]]에서 [[수작]] 사이로 평가받고 있다. 일례로 [[피치포크]]에선 8.5점을 주었는데, 이는 [[벡 한센|벡]]의 명반 [[Odelay]]와 같은 점수이다. [* 물론 9.1점을 받은 [[Siamese Dream|2집]]과 9.3점을 받은 [[Mellon Collie and the Infinite Sadness|3집]]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점수인 것은 사실이다.] 이후 지미 체임벌린이 밴드에 다시 복귀했고 스매싱 펌킨스는 5집 앨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다아시는 [[1999년]] [[10월]], 5집 앨범의 녹음을 완료하고 이유를 밝히지 않고 팀을 떠나[* 빌리 코건은 훗날 인터뷰에서 "당시 다아시 레츠키는 [[코카인]] 중독 문제가 있었고 영화 배우로서의 데뷔를 준비한다며 밴드 활동도 소홀히했다. 그래서 나머지 밴드 멤버들은 상의끝에 다아시를 밴드에서 방출하기로 결정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활동을 완전히 접었고[* 저작권 소송 건 제외하면 거의 은둔 생활을 하다가 2009년 방송에 출연해 미시건 주에 정착했다고 밝혔다. 몸이 안 좋아서 한동안 은둔 생활을 했다가 2016년 건강이 회복되었는지 활동 재개를 선언했다.] 밴드는 [[홀(밴드)|홀]]의 베이시스트 멜리사 아우프 데어 마우어를 영입하였다. (멜리사는 투어 세션 멤버로 5집 앨범 레코딩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2000년]] [[2월 29일]], 스매싱 펌킨스는 5번째 앨범 Machina: the machines of god을 발표했다. 앨범은 전작 의 연장선상인 변형된 테크노 사운드와 밴드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두터운 퍼즈톤의 사이키델릭한 분위기, 중세풍의 컨셉으로 엮인 가사, 독일의 표현주의에 입각한 뮤직비디오로 중무장하였지만 팬들의 관심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150만장이 팔리며 전작보다도 낮은 판매량을 보인다. 여기에 그동안 빌리 코건의 독단적인 밴드 운영에 불만이 많았던데다 1998년 솔로 1집을 낸 이후부터 개인 활동을 시작한 제임스 이하가 5집 활동을 마치고 밴드에서 탈퇴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고 결국, 밴드는 2000년 월드 투어를 끝으로 해체를 선언, 그 해 12월, 밴드로서 처음 공연했던 고향 시카고의 '메트로' 클럽에서 마지막 공연을 갖는다. 해체 직전 스매싱 펌킨스는 마지막 앨범 세션 당시 녹음했지만 앨범에는 미수록된 곡들을 모아서 Machina II/The Friends & Enemies of Modern Music 이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공개한 적도 있다. 이는 [[라디오헤드]]보다 10년 앞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